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먼저 된 자들 중 많은 이들이 나중 될 것이고, 그들은 하나(One)가 될 것이니라”(도마복음 4:2).

 

  마태는 위 구절을 “포두원의 품꾼”들을 비유하여 기록하고 마지막에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고 하였다. 신학적 해석은 “영적 자만(自慢)을 경계하기 위함이며, 역전극(逆轉劇)을 암시한다”고 한다. 이러한 역전극(逆轉劇)은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진리”(One)가 아니다. 예수님은 먼저와 나중을 나누는 이원성(二元性)의 분별 시비를 벗어난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 하나”(一卽一切 一切卽一)인 충만한 진리를 깨닫게 되면 완전한 “하나님과 하나”(One)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형체만 보면, 모든 것은 변한다(諸法無常) 그러나 실체인 영원한 진리의 차원에서는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時空을 초월하여 먼저와 나중, 늦지도 빠르지도 않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티끌 그대로가 우주 전체이며, 한 순간순간이 그대로 영원이다. 또한 음양(陰陽)의 조화로서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의 진리처럼 모든 현상이 극에 이르면 반대를 향해야 한다.

 

  유기체(有機體) 과학을 강조하는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은 동양 사상과 같이 하나님(One)은 “시원적(始原的)이면서 결과적이므로 시작과 끝으로서 세계와 분리되지 않는다”고 하며, 역(易)의 신학도 음양(陰陽), 먼저와 나중은 서로가 갈등하는 실재들이 아니라 상호 보충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설적인 음양의 조화를 바울은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고 고백하며, 老子는 “無爲 즉 함이 없는데 까지 이르면 되어지지 아니함이 없다”(無爲而無不爲: 도덕경 48장)고 하였다.

 

  법화경(法華經)의 비유품(比喩品)에서 진리는 시간상 길고 짧음의 이원적(二元的)인 구분이 사라짐을 강조하고 있다. 처음과 끝이 바로 “지금의 한 생각”(現前一念)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옛과 지금이 한시절”(古今一際)이고 느리고 빠름이 동시에 얼어난다는 것이다(延促同時). 老子는 상호(相互) 보충성(補充性)과 상관성(相關性)인 不二의 진리를 “화(禍)여, 복(福)이 너에게 기대어 있구나. 복(福)이여, 화(禍)가 네 속에 엎드려 있구나. 누가 그 끝은 알리요?(禍兮, 福所倚, 福兮, 禍所伏, 孰知其極: 道德經 58장)라고 설명하였다.

 

  20세기의 물리학에서 時空이 통합된 아원자(亞原子) 세계의 탐구는 물질의 본래적인 역동적(力動的) 본성을 밝혀 주었다. 즉 입자들은 정적(靜的)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상호 관계하며, 전체적(One)으로 조화롭게 나누어 질 수 없는 그물(net)인 망(網)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먼저와 나중, 주객(主客), 등으로 구분하는 時空의 3차원적인 개념은 時空의 통합인 4차원의 진리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동양의 비이원론적(非二元論的)인 전일성(全一性)의 세계관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영원 불변한 “궁극적 진리”(On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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