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고, 둘 아님이 믿는 마음이다.”

 

  둘 아닌 믿음(信心)이란 생각을 일으키는 자와 그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세계이다. 不二인 전체의 진리를 믿는 믿음은 “마음의 눈”(佛眼)을 뜨는 것이다(信·解·悟·證). 즉 " ego적인 내가 없음”(無我)을 깨달은 후 우주 전체가 “존재 자체”(true Self)로 하나(One)가 되는 경지이다. 그러므로 “佛性과 하나”(One)가 되는 순수한 마음이 신심(信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눅 8:40-56).

 

  예수님은 열 두 살인 외딸의 죽음을 알고 비참하게 된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즉 외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전체(All)인 不二의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네 딸이 살아난다는 것이다. 야이로의 딸은 자기 아버지와의 의존 관계와 왜곡된 ego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사랑의 집착에서 벗어나자 스스로 자립하는 소녀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부활한 것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님의 존재 · 삶 · 죽음 · 부활이라는 개체성인 역사적 사실에 있지 않고,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실존하게 했던 초월적 근저, 즉 時空을 초월한 전체(All)인 “부활의 그리스도”(true Self)를 믿는 것이다. “우리와 항상 함께 있는”(마 28:20) “부활의 그리스도”(true Self)는 時空안의 역사의 예수와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영원한 구원은 역사의 어느 일점이 아닌, 전체적이며,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하나(One)인 진리를 믿고 깨닫는 것이다. 즉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마 7:21).

 

 

  그들이 예수님께 말했다. “우리가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말해주시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하늘과 땅의 형세는 분별하지만, ‘그대들의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들은 이 신비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른다”(도마복음 91).

 

  예수님은 時空안의 대상물은 분별하지만, 내면의 변화인 회개(metanoia)를 통하여 時空을 벗어난 “영원한 지금”을 모르고 있는 것에 실망하고 있다. “그대들의 면전에 있는 사람”은 어둠의 ego가 제거된 영원한 광명의 “참나”(true Self)이다.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육체에 집착해서는 하나(One)인 “예수님의 참모습”(true Self)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님이 오심은 “이원적(二元的)인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함이다”(갈 3:3)고 하였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구원의 이분법적인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단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진리의 신비를 가르쳐 주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구원의 신비는 이기적인 ego의 목숨을 제거하고 “신적인 본질”(true Self)을 회복하여 영원한 하나(One)가 되는 것이다(눅 9:24). 따라서 구원은 “하나 됨”(One)이며, 일치이다. 개인이 이기적, 자기 중심적인 삶을 떠나 사랑으로 “하나님과 하나”(One)되고 “타인과 하나”(One)되어, 소외, 단절을 극복하고 더 “큰 자아”(true Self)를 실현하는 것으로 거기에 영생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