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다.”

 

  있음과 없음이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있음과 없음이 가장 통하기 어려우나 진여법계에서는 모든 것이 원융(圓融)하여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불안(佛眼(은 망상이 실상이고 실상이 망상이며, 차별이 무차별이고 무차별이 차별이 되는 분별 시비에서 벗어난 영원한 )二의 세계를 보는 영적인 눈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나라가 임하시오며”(Your kingdom come. 마 6:10)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으며,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기도는 완전한 헌신으로 “당신이 모든 것입니다”의 의미이다. “하나님과 하나”(One)가 되었을 때 이루어지는 즉 “그저 있는 그대로의 상태”(無爲自然)이다. 이러한 하나됨(One)에서 나오는 완전한 헌신(獻身) 즉 순복(順服)이 이루어지려면 이원론적(二元論的)인 분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즉 이기적인 나(ego)와 “나의 것”은 완전히 사라지고, 神 즉 神性(true Self)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깨달음이며, 지혜이다.

  우리는 스스로 이원성(二元性)의 의식이 사라진 무념무상(無念無想)이 되어 지금 여기에 하나님 나라가 임재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이러한 하나됨(One)은 時空을 초월하여 있음과 없음이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있는 것은 모든 차별이 소멸된 경지이다. 이러한 경지는 차별이 사라진 순수한 無心의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체험할 수 없는 축복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아담으로부터 세례 요한까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진리를 보기를 원하는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너희 중 어린아이와 같이 되면 하나님 나라를 알겠거니와, 그는 요한보다 더 크게 되리라”(도마복음 46).

 

  세례 요한조차도 내면의 변화인 회개(metanoia)를 통하여 “보는 것을 보는 눈”인 “내면의 눈”(눅 10:23)이 열려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된 사람에 비할 수 없다. 즉 그는 어린아이가 있음(有)과 없음(無)을 나누는 이원성(二元性) 사유에서 해방되어 모든 것의 차별을 벗어나 전체적(One)으로 보고, 양극이 조화되는 천국을 누리는 것에 비하면 가장 작은 자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너희 중 어린아이와 같이 되면 하나님 나라를 알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즉 순수한 어린아이는 본래부터 아무런 죄가 없기에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심과 신경쇠약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바울의 “모든 삶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롬 5:12)는 보편적인 죄의 교리는 재해석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