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냇가에 심은 나무 제15호 (2003.11)  --


- 표지글  -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합시다


유병근 목사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잠언 27:17)



     지금의 행주대교가 있는 강가에서 전하여 오는 형제간의 사랑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형제들이 금덩어리를 갖고 있었는데 강의 한 가운데 와서 형제 중에 한사람이 금덩어리를 물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 금덩어리가 있는 동안 금에 대한 욕심으로 인하여 형제우애의 상처가 나는 것을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금은보화보다
더 소중한 것이 형제의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요즘같이 인명이 경시되고 형제우애가 약해지고, 반면에 황금만능주의로 치닫고 있는 때에 위의 형제들의 이야기를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대 기업인 현대의 최근의 일어난 안타까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좋은 아버지를 만난 남다른 환경과 엘리트 예우를
받으며 살다가 아버지가 지어 놓은 사옥 12층에서 투신하여,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자동차인 엠블런스에 실려서 아버지가
이룩한 그 병원으로 가고, 아버지의 영결식장인 그 장소에 안치되고 아버지가 마련한 선영에 안장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힘이 들고 죽어야 할 정도였을까요?


     오늘 이 땅에는 정말 힘이 드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것도 기초적인 즉 먹는 것, 입는 것, 추위와 더위를 피하여야
할 집 문제로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망에 부닥쳐서 죽고 싶으나 일말의 양심과 관계된 가족과 이웃으로 인하여 참고 견디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고인이 거느리는 회사 직원들이나 말단의 일용직 중에도 이렇게 어려운 이들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경영주, 즉 사장이나 높은 이들의 회사에 사원이라는 것, 그리고 묵묵히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높은 분들을 모셨다는
긍지와 위의 분을 바로 얼굴로 생각하면서 견디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다른 환경과 지도층에 있던 분이 무엇이 그리도 죽어야 할 만큼 답답하여 가족과 온 국민이 애석하여
하는 일을 저질렀을까요?

     또 궁금한 것은 고인이 죽고 싶은 상황에 처하였을 때 찾아가서 아픔을 나눌, 그리고 이 아픔에 찾아올 형제가
왜 없었을까요? 9남매나 된다고 하였는데......

     몹시 안타까워서 넋두리를 하여 봅니다마는 죽은 자의 속사정을 헤아리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또 일반적인
개념으로는 "그랬었구나!" 하는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은 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칼이나, 창의 날을 세우는 도구는 같은
재질의 쇠로 합니다. 낫을 숫돌에서 갈았거든요.

     마찬가지로 친구의 얼굴을 세워주고 빛나게 하는 이는 다름 아닌 같은 친구들입니다. 형제의 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간의 얼굴을 세워 주어야 합니다. 형제를 높임은 큰 인격입니다. 나를 낮춤은 큰 사람됨의 표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간 것이 친구(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주님의 교훈입니다.

     철은 철을 다듬어두 주지만 철을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친구가 친구의 얼굴을 세워 줄 수도 있지만 친구의 얼굴을
추하게도 합니다. 형제가 형제의 얼굴을 세워주질 못한다면 형제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 서로를 세워줍시다. 서로의 얼굴을 빛내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