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냇가에 심은 나무 제18호 (2005 가을호)  --



주님 내 눈에 눈물이 마르지 않게 하소서


김 한 표 집사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가을호’ 원고를 요청 받으면서 한바탕 웃음이 터저 나왔다. 손바닥만한 쪽지에 “제목:자유”라고 적혀 있는 것이 ‘자유’를 주제로 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제목을 자유롭게 선정하여 써 달라는 것인지 순간적으로 거시기 했기 때문이다. 물론 웃자고 해본 예기지만 막상 뭘 써야 할지, 어떻게 써야 할지 한동안 막막하기만 했다.
  마침 ‘여름호’가 나왔기에 한부 가져와서 첫장에 목사님이 쓰신 가슴 뭉클한 체험담에 이어 여기저기 훑어보고 있는 나에게 집사람이 “여보! 이 아무개 집사님이 쓴 글 좀 읽어봐요. 정말 눈물이 나요.”라고 하는게 아닌가. 사실 우리 집사람은 평소 눈물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함께 살아 오면서 눈물을 보인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고 보니 땀도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불한당이라고 가끔 놀리기도 한다. 그런 사람이 우리 교회 봉순 언니(봉사하는 순박한 언니)의 ‘추억의 영상 편지’를 읽고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일임에 틀림이 없다. 세월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어쨌거나 눈물! 나는 그것을 참 좋아한다. ‘남의 눈물’이 아니라 ‘나의 눈물’을 좋아한다. 기뻐서 울고, 슬퍼서 울고, 기가 막혀서 울고 ... 울면서 흘리는 눈물(淚)이야 말로 눈물(雪花水)처럼 온갖 마음을 담아낸다. 우리 예수님도 나사로가 죽었다는 부고에 눈물을 흘리시며 우셨다. 진정한 눈물은 가슴에서 솟아난다. 가짜 눈물인 ‘악어의 눈물’이 있다고는 하지만 ‘눈물은 참 순수하다’고 시인 김현승은 ‘눈물’을 그렇게 노래했다.

  이 세상천지에 눈물 없는 빵이 어디 있으며, 눈물과 무관한 삶이 있겠는가마는 지금 나에게 있어서 눈물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눈물’은 내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수단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하는 증표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 세 이름은 나로서는 주체할 수 없는 이름이다. 알아가면 갈수록 가이없는 분들이다. 어떻게 미물인 내가 그분에게 선택되어 구원 받고 신령한 축복까지 체험하며 살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할 수록 ‘눈물’ 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때때로 고난에 아파 울고, 그 고난 중에 주님이 함께하심을 발견하고서 울고, 그리고 그 고난이 내게 축복이라는 사실에 감격하여 운다. 그래서 눈물은 내게서 떠날 날이 없나보다. 사나이 대장부가 눈물이 헤프다고 흉볼는지 모르겠지만 낙망하여 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우는 것이니, 아! 어떠랴. ‘눈물’이 내 영혼의 보약인 것을, 내 영혼을 씻어주는 정한수인 것을 ...

  주님께 나는 가끔 이런 기도를 드린다. “주님! 저는 아무래도 방언 기도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특별한 달란트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오니 눈물의 은사를 주셔서 그냥 울게만 해 주십시요.”
  내 눈에 눈물이 마르는 그 순간이 내 인생길에 가장 위험한 순간일 거라는 믿음으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확인해본다. 그래서 나는 눈물을 좋아한다.

  주일 오후 예배에 특송을 위해 회중 앞에 설 때가 종종 있다. 이 때도 주님은 내게 큰 은혜를 부어 주신다. 물론 눈물로 말이다. “한표야! 내 앞에서 울면 사람들 앞에서 결코 울지 않는다. 네가 흘리는 눈물 내가 닦아주마. 내 앞에 무릎 꿇으라, 그리하면 세상 영화 앞에 결코 무릎 꿇지 않을거야.”라고 타일러 주시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더욱 많이 운다. 내 안에 있는 성령님이 떠나시지 않을까? 이 은사 소멸되지 않을까? 조심조심 또 조심하며...
  한없이 부족한 나는 오늘도 주님의 은총만을 사모한다. 눈물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조국과 조국교회를 위해, 주님 다시 오실 그 세상을 위해 울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