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의 고통을 푸심(행2;22-24)

사람들의 갑작스런 변화들은 반드시 어떤 동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좋은 방향이거나 좋지 않은 쪽이거나 그러합니다. 본문의 베드로의 변화는 좋은 쪽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였고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본문 14-36절은 이렇게 변화된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그 중에서 2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사망에 메어 있을 수 없음’이었다고 함은 마치 사망과 고통의 굵은 줄이 인간을 얽매고 있음을 뜻하며 ‘풀어’ ‘매어’ 함은 ‘줄’ 이야기입니다.

1, 사도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소위 ‘줄’과 연관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어부였습니다. 제자로 소명되기 전에 바닷사람이었고 부르심 받는 당일에도 그 형제 안드레와 함께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배를 뭍에 고정을 시킬 때에 줄이 필요하였고 배를 물에 띄울 때에도 그러하였으며 고기를 잡는 그물, 잡은 고기를 보관함에도 그 고기를 건조시킬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줄’입니다.

설교자들은 평소 영향을 받는 대로 표현이 됩니다. 농부출신의 설교자와 어부출신의 설교자는 그 풍김에 큰 차이가 날 것입니다. 설교에는 삶이 묻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오늘 설교(24절)에 ‘풀어’ ‘매어’ 하는 줄의 언급은 삶에서 묻은 영향일 것입니다.

2, ‘줄’에 매어 있는 인생은 비극적인 환경입니다.

흉악의 결박, 줄, 멍에의 줄입니다.(사58;6), 음부의 줄입니다.(삼하22;61). 사망의 줄입니다.(시18;4) 악인의 줄입니다.(시119;61) 죄의 줄입니다.(잠5;22) 이런 줄은 인간을 멸망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성경저자들은 실재적으로 인간을 불행으로 끌고 가는 생생한 기록을 보여줍니다.(고전12;2, 딤후3;6 약1;14) 이런 줄은 마귀가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오래전 금당 살인 사건의 흉악범 박 철웅은 사형선고를 받고 있는 중에 극적인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형 집행 시에 그 장기들은 모두 기증하였습니다만, 그가 쓴 책 제목은 ‘내 목에 밧줄이 놓이기 전에’였습니다. 우리 목에는 마귀가 놓으려는 밧줄이 있습니다. 방심하면 우리를 멸망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비극적인 환경이지요.

3, 이런 비참함에서 우리를 살리심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무법한 자들의 손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23)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를 사망과 고통의 굵은 줄에서 풀어 살리셨습니다. 사망에 매어 있는 그들을 살리심이 십자가 고난이며 그 고난으로 죽으셨다가 다시사신 부활사건입니다.

예수의 다시 사심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즉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는 복입니다.

마치 사냥꾼의 올무(그물)에 걸렸다가 도망 친 새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의 줄에서 푸시어서 참 자유,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지난주일 유 병근 목사님 오후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