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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우를 지키자"


유병근 목사


 


설교본문


창세기 4장 9 ~  12절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설교요약


"형님먼저 아우 먼저" 라는 말을 오랫동안 우리가 지닌 형제의 표현입니다. 물론 흥부 놀부이야기 같은 서글픈 형재애도 없지는 않지만 형제의 사랑은 우리의 자랑거리였습니다. 형은 의례히 동생들을 돌봐야 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불행한 기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동생을 죽인 형에게 책임을 추궁하자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하는 후안무치의 답을 하였습니다.



1. 여러분에게 아우는 누구입니까?

국어사전에는 아우를 세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같은 항렬의 남자끼리나 여자끼리 사이에서 나이가 적은 사람을 나이가 많은 사람이 부르는 말이며, 둘째는 친척관계는 없지만 사이가 가까운 남자끼리나 여자끼리 자기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을 나이가 많은 사람이 부르는 말이며, 셋째는 같은 또래의 남자끼리나 여자끼리에서 자기를 겸손하게 일컫는 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아우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성도가 여기에 해당되는 아우가 없다면 성도답지 못한 것입니다.



2. 아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는 것은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아우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아우가 형으로 인하여 생명을 잃고 있는데 그걸 내몰라하는 것은 무정, 잔인함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를 함께 드려야  할 아우 즉, 가족, 형제, 이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형편이 어떠합니까?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아우가 반드시 구원을 얻어야 하는데 어디에선가 영적으로 방황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픈 마음을 가지고 이 빈자리로 인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3. 아우의 형편을 묻는 질문에 합당치 못한 답 두 가지

1)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라는 가인의 답은 고의적인 거짓말입니다. 자신의 책임있는 죄를 은폐하려는 악한 태도입니다. 그는 동생의 형편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뻔뻔스럽게 시치미를 떼는 것은 강팍한 심령입니다. "제 아우를 잘 관리하고 있습니다."해야 합니다.

2)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가인의 질문형 답은 하나님을 향한 트집입니다. 형은 아우를 보살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형 혼자 편하고 복 받고 사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아우의 육신도 영혼도 보살펴야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아우 같은 이웃의 영혼을 외면하면 그 피를 형에게서 찾겠다는 것입니다.



4. 아우인 나를 책임지신 주님

예수님은 아우 같은 죄인인 날 위하여 십자가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강도를 만나 다 죽어가는 사람을 내노라 하는 사람들은 다 못 본척하는데 신분이 낮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구출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곧 예수님이십니다.

아우와 함께 믿고 제자가 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처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같은 형제간의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나중에 천국 문 앞에서 하나님이 형을 향하여 아우는 왜 오지 못하였느냐?고 물으시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우를 인도합시다. 천국의 스타의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인도한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