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 한가운데 담대히 서서 그들에게 육신으로 나 자신을 나타내었다. 나는 그들이 모두 취해 있음을 보았고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 목말라 하는 자가 없음을 보았다. 나의 영혼이 사람의 아들들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그들은 마음의 눈이 멀어 자신들이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왔다가 다시 빈손으로 세상을 떠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취해 있지만 저들이 술에서 깨어나면 의식이 변한다”(도마복음 28).



   예수께서 마음 아파하신 것은 사람들이 “상대적인 세상”(ego)에 빠져(취하여) “절대적인 진리”(true Self)에 대하여 목말라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취하여 있기 때문에 담대히 서 있는 “神性(true Self)인 그리스도”(One)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마음의 눈”(마 6:22)이 멀어 자신들이 이 세상에 ego없이 왔다가 다시 ego없이 세상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ego적인 술 취함”에서 깨어나면 “내면의 빛”(One)인 “영원한 생명”(true Self)을 깨닫게 되는 마음의 변화인 회개가 일어난다.


   고통과 죄의 치유는 “이원성의 술 취함”(ego)에서 깨어나 하나(One)를 찾는 회개이며, 이렇게 ego가 소멸될 때 내 생명의 본질인 神性(true Self)이 회복되는 것이다. 따라서 죄는 “하나(One)인 자신의 정체”(true Self)를 깨닫지 못하고, 부분인 양변(兩邊)으로 치우치는 “이원론적인 사유의 삶”(ego)이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들에게 “나는 누구인가?” 즉 자기의 실상을 알게 함이며(요 18:37), 나의 “생명의 실상(true Self)은 허망한 육체가 아니라 神性이다”(Immanul)*는 “절대적인 존엄성”(One)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불교의 목적도 “자신의 本性인 본래면목”(One)의 佛性(true Self)을 깨닫는 것이며, 성자(聖者)들은 내면의 수행으로 움직임(動)과 멈춤(止)을 나누는 이원성에서 자유롭게 된 자들이다. 예수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다”(요 17:14)고 말씀하신 것은 “우주에는 오직 하나(One)인 하나님(佛性)뿐이다”(山川草木 悉皆成佛)는 “不二의 진리”(유기체적 세계관)를 의미하고 있다(萬法歸一). 따라서 우리들이 “고통과 악의 뿌리”(ego)를 뽑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One)의 생명”(神性: 佛性)인 “진리(One)를 깨닫는 것”이다.



* 임마누엘(Immanul)의 의미는 현대 과학자들이 물질의 근원은 “텅 빈 허무”(空)라고 한 것 같이 우리의 몸은 하나의 “텅 빈 空의 무더기”(假爲空聚)이지만, 그러나 “모든 허망한 존재의 근본성품인 神(神性: One)의 영(靈)은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打成一片). 이러한 “음양의 조화”(One)인 神性(true Self)의 현존(現存)을 깨닫게 되면 걸림이 없고 집착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요 8:32). 예수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 5:13)고 한 것 같이 “내면의 빛”(神性)에 의한 자연스러운 “無爲의 삶”(One)이 어둠인 “고통과 악”(有爲: ego)을 소멸하는 구원이며, 영원한 진리자체(One)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