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말씀하셨다. “찾는 자는 발견할 것이며, 내면(inside)을 두드리는 자에 게는 열릴 것이다.”(도마복음 94)



  성경에서 마태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7:7)라고 하였다. 이 구절을 하나님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응답해주실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기복적인것이아니라, ‘문’은 내면의 있는 ‘몸된 성전의 문’(One)이며, ‘천국의 길’인 성령(참나)을 자각하라는것이다(눅 11:13). 구원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주여 주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마7:21), 거짓 나(ego)를 버리고 내면의 참나(그리스도)를 찾아 나선 자가 시공간을 초월하는‘마음의 눈’(One)을 여는 것이다(마 6:22).


  항상 변하는 현상계(ego)에서 간구하는 모든 것은 생겨나고, 사라지는 헛된 것이다(生滅法). 따라서 예수께서 찾으라고 하신 것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고, 마음과 감정(ego)으로 측량키 어려운 하나(One)의 신성을 위한 ‘가난한 마음’(無我,마5:3)이다. 그곳은 ‘이원적인 생각으로 헤아리는 망상’(ego)이 사라진 영원한 ‘영적인 경지’(참나)로서, 불행과 슬픔이 그에게 찾아와도 그는 그 속에서 축복과 무한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찾는 자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진리(One)를 향해야 하고, 밖을 향해 찾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향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내면에 있는 이원적 집착의 껍질(ego)이 벗겨지고, 보고寶庫인 천국(참나, One)을 찾게 된다(눅 17:21). 불교의 극락은 영원한 참나(靈)인 자성自性이 부처임을 믿고, 집착(ego)의 껍질을 깨는 깨달음(One)을 통해 얻는 것이다. 맹자는 천국의 자리(참나)를 구하는데 유리한 것은 “구하는 것이 본래 나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求在我者也)고 하였다.


  진리의 깨달음으로 현상계의 악업惡業을 녹인 자는 억지가 아니라 오직 할 뿐이며(無爲), ‘심는 대로 거두는 결과’(갈 6:7)인 순리에 자신을 맡긴다(自作自受). 아집과 번뇌에 따라 업業이 있고, 업業에 따라 업보業報 가 있다. 부처는 “그 몸뚱아리를 ‘나(ego)다, 나의 것이다, 나의 자아다’라는 생각을 버려라”(뱀의 비유경)고 말씀하셨다. 나의 지위, 권력, 재산 등 이런 것들은 모두 공중에 떠다니는 비눗방울과 같다. 


  인도의 중세 시인인 까비르는 “죽음! 온 세상이 두려워 떨지만, 그러나 나의 가슴은 기쁨으로 넘쳐흐르며, 죽어 나 자신을 무아경無我境 (One)에 온전히 내줄 날은 언제인가?”라는 시詩를 남겼다. 그에게서 죽음은 ‘신과 하나’(One) 되는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진리를 깨닫고, ‘온전하게 된 자는 선생(그리스도)이 되어’(눅 6:40) 죽음을 비롯한 어떠한 문제에서도 초연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조화로운 삶이 가져다 주는 모든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